승부사 폴 베어 브라이언트

승부사 폴 베어 브라이언트

승부사 폴 베어 브라이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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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것만큼 기쁜 것도 없다


폴 베어 브라이언트 Paul “Bear” Bryant(1913~1983)가 1955년 텍사스 A&M 미식축구팀 감독을 맡아 활약하면서 가장 고충이 컸던 게 있다면 참을성을 기르는 것이었다. 한번 와해된 팀을 다시 재건하는 데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브라이언트는 인내란 팀 내부에서 생겨나는 잡음을 참는 것이지 패배마저 허용하라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브라이언트는 텍사스에 오기 전에 메릴랜드 주립대학과 켄터키 주립대학의 감독을 역임한 바 있었다. 브라이언트가 부임한 첫해, 텍사스 A&M의 성적은 1승 9패로 매우 초라했다. 미식축구 지도자 생활 38년간 이처럼 패배로 점철된 해는 없었다.

다음 시즌 첫 경기에서 텍사스 A&M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상대로 전반에 21대 0으로 밀리고 있었다. 결국 브라이언트는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로 결심하고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모든 선수들을 라커룸에 불러들였다.

브라이언트는 선수들에게 필드로 나가기 전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보도록 했다. "오늘 경기가 끝난 뒤 다시 여기 모여 거울을 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거울 속의 자신에게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맹세를 한다. 저녁에 돌아와 오늘 경기에서 최선을 다했는지 거울에다 물어 보는 거다. 앞으로도 거울 쳐다보기는 계속할 것이다."

존 언더우드 John Underwood가 쓴 브라이언트의 전기 『곰 Bear (브라이언트의 생전 별명)』에서는 그가 첫 승리를 이끈 비결 중 하나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브라이언트의 팀은 다음 시합에서 강팀 루이지애나 스테이트 대학팀을 28대 0으로 꺾었다. 그 뒤에는 승승장구였다. 여기에는 브라이언트의 적절한 격려와 재능 있는 신입생을 선발해서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 크게 작용했다. 텍사스 A&M은 그 시즌을 7승 2무 1패의 성적으로 마감했다.

브라이언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용기를 북돋는 일은 승자와 패자를 구분짓는 중요한 요소다.”

 

브라이언트 밑에서 코치로 일한 적이 있고 훗날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붐 필립스 Bum Phillips는 이렇게 말한다. “브라이언트는 팀을 이끈 게 아니라 사람들을 지도했다. 그에게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실제로 소위 브라이언트의 지휘방식은 선수들에게 빨리 뛰라며 소리지르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서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식이었다.

전 프로팀 감독이자 전 앨라배마 주립대학 감독인 진 스털링스 Gene Stallings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브라이언트 밑에서 선수로도 있어 봤고 코치로도 있어 봤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앎과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했다."

브라이언트는 선수들만 격려하고 북돋운 게 아니다. 코칭 스태프 전체와 자기 자신까지도 그 대상이었다. 1913년 아칸소주의 벽촌인 모로 버텀에서 12남매 가운데 11번째로 출생한 브라이언트는 어려서부터 거친 농장일을 해야 했다. 나중에 브라이언트는 이렇게 말했다. "코치로서의 성공비결이라면 어려서 한 농사일일 것이다. 일단 노새에 쟁기를 메워 밀고 나가면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이미 몸으로 배웠다. 또 단돈 50센트 일당을 받으며 목화밭에서 고된 일을 했던 것도 훗날 소중한 교훈이 됐다."

브라이언트가 처음 미식축구 지도자로서 일을 시작한 것은 1945년의 일이다. 이후 사망하기 한 해 전인 1982년까지 미식축구는 그에게 인생 그 자체였다. 이 기간 동안 세운 323승이라는 기록은 미국 대학미식축구 1부 리그에서 한 사람의 감독이 세운 최고기록이다. 또 1958년 그가 팀을 맡기 전에는 3년간 겨우 4승밖에 못 거둔 앨라배마 대학팀을 이후 6번이나 전국대회 우승팀으로 만들었다. 1986년에는 자기 이름을 명예의 전당에 올리는 영광도 누렸다.

 

오래 전부터 해온, 평범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


세월이 흘러도 브라이언트는 지도방식 가운데 몇 가지만 바꿨을 뿐 나머지 근본적인 것은 고수했다. 1974년 쓴 책에서 그는 “철저한 준비, 일에 대한 헌신, 오래 전부터 해온, 평범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에만 충실하면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앨라배마팀에서 감독직을 맡았을 당시 브라이언트는 그냥 감독이 아닌 가장 위대한 감독이 되리라 결심했다고 한다. 브라이언트의 결심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스스로에게 “성공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점이다.

다음은 젊은 시절 켄터키 주립대학에서 일하던 당시 남긴 글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하지 않으면 못 견디게 만들 것이고 나 자신도 밤낮으로, 집에 가서 소파에 앉아서도 일에서 손을 떼지 않겠다." 한마디로 다른 코치나 선수들에게 모범이 되고자 한 것이다.

브라이언트의 이런 열정은 "코치들이 5시 반에 나오면 나는 5시에 현장에 나간다"고 남긴 메모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신 브라이언트는 “나 같으면 하지 않을 일을 선수들에게 시키지는 않겠다"고 자주 다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브라이언트는 선수들과도 최대한 가까운 사이가 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이런 친밀감을 위해 선수와 감독이라는 형식조차 무시한 적도 많았다. 곧잘 “나는 선수들을 마치 내 아들들처럼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다.

사실 브라이언트가 선수들에게 하지 말라고 규제한 것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선수들이 지킬 일이라곤 연습시간 정시에 나오고 신사답게 행동하며 언제나 기도하고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규칙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것을 브라이언트는 용납하지 않았다. 1963년 대회에서 당시 팀의 스타급 쿼터백이었던 3학년 조 나마스Joe Namath가 연습을 빼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시즌 마지막 두 경기에 출장을 정지시켰다. 사실 그가 없으면 시즌 우승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출장정지 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앨라배마는 나머지 두 경기에서 승리해 우승을 거머쥐었다. 나마스도 그 뒤 자신의 실수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자신을 경기에서 쫓아낸 브라이언트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하곤 했다. 또 앨라배마팀의 또 다른 선수이며 훗날 NFL(National Football League)에서 쿼터백으로 활약하게 되는 켄 스테이블러 Ken Stabler는 “학점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출장정지를 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팀에 대한 책임감을 배웠다. 브라이언트는 내게 오랫동안 교훈에 남을 뭔가를 가르쳤다”고 말했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지도법에서 세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첫째, 적어도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은 미식축구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열정이 가득한 사람으로 뽑는다. 둘째, 이기는 선수를 알아봐야 한다. 그들에게는 모두 일정한 공통점이 있다. 셋째, 그가 주장하는 승리의 비결은 만일에 대비한 모든 계획을 마련해 매진하라는 것이다. 브라이언트는 "시합이건 연습이건 상대를 전반에서 20대 0으로 따돌릴 궁리를 하라고 가르쳤다.

스털링스는 훗날 "보통 사람들이 그저 그렇게 대충 사는 것에 만족한다면 브라이언트 감독은 정말 대단한 승부욕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승리는 모두의 공, 패배는 내 탓


브라이언트의 다른 장점이라면 코칭 스태프에게 최대한 권한을 주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브라이언트 자신도 "나는 코치들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해온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이 정말 생각을 하도록 유도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 팀의 훈련 프로그램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고 만일 실수가 있다면 당당히 인정했다. 스털링스는 “브라이언트가 철학을 가졌다면 그건 아마 팀이 이기면 선수가 잘한 것이고 지면 스스로 모든 비난을 감수한다는 생각일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지도방식 때문에 선수나 코치는 모두 브라이언트의 충직한 친구가 되었다. 스털링스가 말한 대로 모두가 브라이언트를 기쁘게 하고 싶어 했다.

또 우수한 신인선수를 발탁하기 위해 브라이언트는 정말 기발한 방법을 썼다. 앨라배마팀에 재직할 당시 모든 주의 공립고등학교 미식축구팀 감독들과 연계를 맺어 좋은 선수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미식축구 선수들이 주로 들르는 병원과 연계하여 고등학교 때부터 누가 좋은 선수인지를 미리 알아내는 것이다.

스테이블러는 "우리가 훈련하는 것을 지켜보려고 전국에서 미식축구 관계자들이 모였다. 브라이언트식 훈련의 가장 큰 장점은 효율성이 높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브라이언트도 "시합 전 선수들의 몸상태가 중요한데, 만일 우리 선수 75퍼센트가 자기 기량의 15퍼센트 이상을 발휘하고 상대편 선수는 모두 15퍼센트 미만의 능력만 쓴다면 우리가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단언했다.

앨라배마팀이 1969년과 1970년 연속 전국미식축구대회에서 6대 5로 석패하자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훈련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점을 반성하며, 달려오는 선수를 맞아 수비수가 마주 달려가며 제지하는 '위스본 T'라는 완전히 새로운 수비방식을 소개했다. 이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브라이언트는 텍사스 주립대학의 감독 대럴 로열 Darrell Royal에게 배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수비법을 동원, 1971년 앨라배마는 11대 1로 승리했고 브라이언트가 은퇴할 때까지 113승 16패 1무승부를 기록하며 기염을 토했다. 1973년, 1978년 그리고 1979년에는 전국대회를 석권하기도 했다.

이런 성공에도 브라이언트는 선수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을 바꾸지 않았다. "시합은 포메이션이 아닌 선수가 하는 것이고, 다만 포메이션이 좋으면 시합이 다소 유리해질 뿐이다."

브라이언트가 가장 좋아한 슬로건은 "승리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두 번째에는 확실하게 맞받아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슬로건이 좀 완고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시합에 몰두하여 이기는 것만큼 기쁜 것은 없다"고 말하는 그는 타고난 승부욕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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